"오늘은 일진이 좋아. 벌써 두 건이야."

27일 오전 서울 서대문구 지하철 2호선 신촌역에서 만난 지하철 실버퀵 기사 김호연(가명ㆍ74) 할아버지는 함박웃음을 지었다. 김씨는 "최근 열흘 동안 하루 한 건도 안 들어 오는 날도 있었다"며 쇼핑백 두 개를 들고 발걸음을 재촉했다.

지하철 실버퀵은 지하철 이용료가 무료인 65세 이상 노인들이 서류나 선물 등의 물건을 전달하는 서비스. 10년 전부터 영세택배업체들이 교통비가 들지 않고 인건비가 싼 노인을 택배기사로 쓰기 시작하면서 생긴 말이다.

↑ 지하철 실버 퀵 기사 김호연(가명)씨가 27일 서울지하철 5호선 열차 안에서 수취인에게 확인 전화를 걸고 있다.

김씨가 아침 9시쯤 지하철역으로 출근해 오후6시까지 서울 시내 곳곳으로 발품을 팔며 한 건을 처리하면 손에 쥐는 돈은 8,000원 남짓. 거기서 회사에 30%를 떼어줘야 한다. 그는 "그래도 추석이 코 앞에 오니까 어제 3건, 오늘 4건이 떨어져서 이번 달도 30만원 정도는 벌겠다"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겨우 일당 만원 수준은 유지한 셈이다.

이날 오전 2만3,000원 남짓한 돈을 번 그였지만 점심을 식당에서 먹는 건 상상조차 할 수 없다. 김씨는 인천 계양역 앞 트럭 노점에서 2,000원짜리 호두과자 한 봉지를 산 뒤 다시 지하철에 몸을 실었다. 35년간 버스 운전을 하다 심장 수술을 받은 후 10년이 넘게 쉬던 김씨는 8개월 전부터 실버퀵을 시작했다. 경비일을 알아봤지만 나이가 너무 많다며 매번 퇴짜를 맞다가 겨우 얻은 일자리다.

얼어 붙은 경기 탓에 온종일 지하철을 전전하는 실버퀵 기사들의 어깨가 무겁다. 추석 대목을 맞아 그간의 부진을 만회해 보려 하지만 3, 4년 전과 비교해선 형편없는 실적이다. 업체 관계자들은 "경기불황에다 서울에 있는 실버퀵 업체 수는 200개가 넘는데도 계속 늘고 있어 사정이 나아질 기미가 없다"고 입을 모은다. 한 실버퀵 업체는 2009년 한 해 매출이 2억원 안팎이었지만 지난해엔 3분의 1도 벌지 못했다고 했다.

장애로 인해 변변한 직장을 구할 수 없어 실버퀵을 택한 이들도 고달프긴 마찬가지다. 지난 24일 오후 지하철 신도림 역 광장에서 만난 박상현(가명ㆍ58)씨는 18년 전 자동차 부품 공장에서 일하다 왼손을 잃었다. 다친 후 같은 공장에서 10년 정도 경비일을 했지만 사장이 바뀐 후 실직한 그는 수원의 한 장애인 단체의 주선으로 공공근로를 했지만 그도 오래가지 못했다. 박씨는 "공공근로를 원하는 장애인들이 많아 혼자만 오래하기가 눈치가 보여 4년 전부터 지하철 실버퀵을 시작했다"며 "한 손뿐이라 덩치가 큰 물건은 회사에서 주지 않아 남들보다 일이 더 적다"고 말했다. 한참이나 울리지 않는 휴대폰을 만지작거리던 그는 대기 두 시간 만에 꽃다발 배달 주문을 받았다. 퇴근시간 복잡한 전철 안에서 꽃잎이 다치기라도 할까 봐 한 팔 가득 꽃다발을 껴안은 박씨는 손잡이도 잡지 못한 채 도착지인 을지로4가까지 비틀거렸다. 박씨는 한 손이지만 상대적으로 젊은 나이라 하루 동안 많이 돌아다닐 수 있어서인지 월 40만원 정도를 번다고 했다.

실버퀵 업체를 운영하는 배기근 대표는 "경기불황에 경쟁까지 치열하다 보니 실버퀵 어르신들의 수입이 크게 줄어들었다"며 "그래도 여기 아니면 일해서 돈을 벌 수 있는 곳이 없는 게 문제"라고 말했다.

조원일기자 callme11@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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