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 출신의 세계적인 북 디자이너 로베르 마생(2006, 도쿄). "한 쪽 눈을 가리고 사진 찍자"는 안상수 교수의 제안에 얼른 자신의 신발을 벗어 눈을 가렸다. 표정과 제스처에 어린아이 같은 장난기가 그대로 묻어나 있다. 그렇게 안 교수가 20여 년간 찍어 온 사진이 3만 장에 이르렀다. [사진 안상수]

삶은 만남의 연속이다. 학교에서, 일터에서, 거리에서 수많은 사람과 마주친다. 그 소중한 만남을 사진으로 남기면 어떨까. 그것을 매일, 십 수년간 지속할 수 있을까. 그래픽 디자이너이자 타이포그래퍼인 안상수 교수(60·홍익대 시각디자인), 그는 했다. 평소에 만나는 사람들을 사진으로 기록했다.

 그런데, 그냥 찍지 않았다. 렌즈 앞에 선 사람들에게 '한 손으로 한 눈을 가려달라'고 주문했다. 어디서나 똑같이 찍는 평범한 사진이 싫어서 그가 택한 설정, 이른바 '원 아이' (one-eye) 사진이다. 1988년부터 20여 년간 그렇게 찍어온 사진이 3만 여 컷에 달한다. 그 중 600여 점이 중국 광둥성(廣東省) 남부 선전(深?)의 화미술관(OCT Art & Design Gallery)에서 공개됐다.

 전시 제목은 '일목요연(日目了然/ONE EYE)'. 지난달 14일 개막돼 9월 10일까지 두 달간 열린다. 중국 측이 기획·제안한 것으로, '원 아이 프로젝트'를 대중에 처음 소개하는 자리다.

1988년 인터뷰 잡지 '보고서\보고서'의 창간호 표지에 나온 안 교수. ◆모든 사람들이 주인공=5일 미술관을 찾은 중국 관객들은 '한 쪽 눈을 가린 사람들' 사진을 보며 탄성을 터뜨렸다. 직장인 리징(26)은 "누구나 찍을 수 있을 것 같은 친근한 사진인데 모든 사람들이 특별한 주인공처럼 보인다. 즉흥적으로 찍은 사진들이 이렇게 작품이 될 수 있다는 게 놀랍다"고 했다.

 실제로 전시된 사진들은 허를 찌른다. 안 교수의 작업실이 있는 서울 상수동 골목의 철공소 남자들, 자전거가게 청년들, 동네식당의 주방 아주머니들 뿐만 아니라 강의실에서 청소하는 여학생(빗자루와 쓰레받이를 들고 있다) 사진이 걸렸다.

 사진 속 얼굴과 제스처도 천차만별이다. 쑥스러운 미소부터 심각한 표정, 갑자기 발동한 장난기로 신발로 한 눈 가린 사람부터, 술병·술잔 혹은 꽃·책으로 한 눈 가린 이들까지. 렌즈의 초점은 사람에 맞춰져 있지만 사진엔 그들과 만난 동네 골목, 기차 안, 국제회의장 객석 등 공간의 미세한 표정이 풍부하게 드러나 있다.

 화미술관의 총감독 왕슈(그래픽 디자이너)는 "안 교수의 프로젝트를 10여 년 넘게 지켜봐 왔다. 중국 젊은이들에게 꼭 보여주고 싶어 적극 제안했다"고 말했다. 그는 "요즘 중국은 빛의 속도로 변화하고 있다. 무언가에 집중하고 또 지속적으로 한다는 게 갈수록 어려워지고 있다. 처음에는 사소했던 게 어떻게 특별한 가치를 얻게 되는지를 잘 보여주는 프로젝트"라고 평가했다.

일본의 그래픽 디자이너 스기우라 고헤이(사진 위). 서울 상수동 자전거가게의 두 청년. ◆3만 장의 사진, 3만 개의 사연=안 교수는 왜 이런 작업에 매달렸을까. 그는 "1988년 금누리 교수(국민대)와 함께 만든 잡지 '보고서 < ee4d > 보고서' 창간호 표지에 쓰기 위해 찍었던 제 사진이 출발점이 됐어요. 별 뜻 없이 재미 삼아 한 제스처였는데, 한 눈을 가려도 그 사람의 특징은 충분히 드러난다는 걸 깨닫게 됐죠"라고 했다. 이어 2004년 블로그를 시작하면서 이번 프로젝트에 속도를 가했다. '일기쓰기'와 같은 작업이 됐다.

 "(사진 3만 장) 하나하나가 소중한 이야기입니다. 찍을 때는 보이지 않던 것이 시간이 지나며 '의미'가 자라는 것을 지켜볼 수 있어요. 저는 사진이 시간에 의해 성숙한다는 말을 믿습니다"

 사람 얼굴에 집착한 이유를 물었다.

 "사람이 가장 흥미롭지 않나요. 지금도 사람 만나는 일이 저를 가장 설레게 해요. 어떤 사람을 새롭게 만나는 일은 내게 새로운 세계가 열리는 것과 같죠. 한 사람을 만난다는 것은 하나의 우주를 만나는 일이니까요."

 안 교수는 사진 한 장 한 장이 그만큼의 사연들이라고 했다.

 "한 외국 디자이너는 원 아이 사진을 찍고 제게 '고맙다'고 하더군요. '지난해에 반신불수가 됐어요. 불편한 한 쪽 얼굴을 가리라고 해주니 참 좋네요'하면서요." 사진을 찍으며 필연 같은 우연의 순간이 얼마나 많은지 깨달았다는 설명이다.

 그는 "'원 아이'라는 영어발음을 중국어로 옮기면 '문애(文愛)'라고 한다. 저는 아무래도 글 무늬, 사람 무늬를 사랑할 수 밖에 없는 운명인가보다"라며 웃었다. 이번 프로젝트는 중국 다른 도시와 한국 전시도 추진 중이다.

선전(중국)=이은주 기자 < juleejoongang.co.kr >

◆안상수=1952년 충주 출생. 그래픽 디자이너. 홍익대 미대 시각디자인과 및 동 대학원(석·박사)을 졸업했다. 한글 글꼴 디자인 분야와 타이포그래피 디자인 분야에서 많은 업적을 남겼다. 특히 85년 개발한 안상수체는 한글의 탈네모틀 흐름을 주도한 것으로 평가받는다.

이은주 기자julee@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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