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뚜라나와 푀르크젠과의 대담 '있음에서 함으로' 마지막 장을 덮었다. 읽는 내내 꼼꼼히 줄을 치고 음미하고 노트에 적고 싶은 마음이 일었지만 그냥 죽 읽기만 했다. 일단은 숲을 보고 싶은 욕심이 더 컸다. 그리고 두고두고 읽어야할 책임을 간파했기에 말이다.


생물학과 철학, 과학, 윤리학, 교육, 사회체계에까지 굵직한 흔적을 패이게 해준다. 삶을 있는 그대로 보기, 성찰하기 그리고 성찰은 삶으로 인도한다. 앎은 삶이다. 삶이 앎이고. 내가 생각한데로, 내가 성찰한 데로 삶은 살아가진다.


시골로 내려오기 전, 이정우선생님으로부터 들뢰즈와 노자 공부에 대한 방향을 잡았지만 그 때는 무언가 있는 듯하지만 정작 무슨 말인지 내 수준으로 이해하기에는 너무 어려웠다. 장회익선생님으로부터 현대물리학과 생명에 대해 공부했지만 역시 내 게으름과 관심 부족으로 이해에 도달하기에는 너무 멀었다.  출가를 고민하면서 손에 들었던 금강경과 반야심경이 계기가 되어 불교에 대해 관심을 가지게 되면서부터 뭔가 변화가 생기기시작한 거 같은데. 놀랍게도 불교를 통해 세상과 나의 관계에 대해 재설정을 고찰하게 되었고, 그를 통해 놀랍게도 이전에 스치듯 들었던 들뢰즈와 노자, 현대물리학과 생명이 나와 연결되기 시작한 거 같다. '아, 혹시 그 때 그 말이 이런 말은 아니었을까?' 하는. '아, 그게 이런 거였을지 몰라' 하는. 그렇게 하나가 꿰어지니까 다른 게 또 꿰어지고 점점 더 연쇄망처럼 연결되어 전체 그림이 윤곽을 잡아가는 듯했다.


하나 더 언급해야할 것이, 불교를 이해하는데는 '연찬'이라는 방법이 더없이 크게 작용했다는 것을 말이다. 내 용어로 변경해보자면, 연찬은 '철학하기'와 다를바 없는 거 같다. '철학하기'. 왜 그런가? 어째서 그런가? 정말인가? 사실은 무얼까? 하며 단정하지 않고 사실을 뭘까 찾악가는 행위. 근본적 성찰. 있는 그대로 보려는 태도.


마뚜라나는 '앎의 나무'라는 책을 통해 알게되었는데, 우리(연찬문화연구소)가 하려는 작업과 너무나 유사하고 근거를 마련해주는 거 같아 순식간에 일독했었다. 연찬문화연구소 멤버가 상황이 여의치않아 현재 연구가 중단되면서 공부도 일단 멈춰있게 되었는데, 개인적으로 '있음에서 함으로'책을 읽으면서 다시 고무된 상태가 된다.


우리가 행위하는 게 삶이지, 행위 따로 삶 따로 있지 않다. 나는 이런 삶을 살고 싶어 하면서 머리에 이상향을 그리면서 그렇지 못한 현실을 살아가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가. 삶따로 행위따로. 그러면서 그런 삶을 살지 못하는 이유에 대해 갖가지 이유를 제시할려고 한다. 사회가 불평등해서, 교육이 문제가 있어서 가정이 지원해주지 않아서 관계가 원만하지 못해서 개인이 능력이 없어서.


그런가? 정말 그럴까? 사실은 무얼까?


나는 내가 보고싶은 데로 보고 듣고 싶은 걸 듣고 느끼고 싶은 걸 만진다. 즉 내가 하고싶은 데로 세상을 본다. 내가 하는 데로 세상이 구축된다. 나와 별개의 세상, 사회, 가정, 관계라는 건 없다. 내가 예수의 삶을 살고 싶으면 그렇게 살면 되고, 부처의 삶을 살고 싶으면 그렇게 살면 되고, 내가 바라는 삶이 있으면 지금 그렇게 살면 된다. 그냥 그러면 된다.


핵심은 정말 내가 어떻게 살고 싶은가? 아니겠나. 지난날의 습으로 돌아가지는 몸과 의식이 크다면 또 해보고 해보고 또 해보고 하면서 계속 살아가면 된다. 안된다는 건 내가 바라는 상을 미리 굳혀놨으니까 거기에 비해 안된다는 것이다. 또는 그만큼 마음을 내지 못했다는 것이기도 하고.


그렇게 해야한다가 아니라, 그렇게 정말 살고싶은가? 바라보고 성찰하고 있는 그대로 봐줘야한다. 아니면 아, 아니구나 하고 인정하고 내려놓고 거기에 맞춰 살아가는거지. 그게 나이니까.


'우리는 우리가 세상을 살아감으로써 살아가는 세상을 내어놓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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